2019년 2월 17일 일요일

2019년 2월 둘째주 ~ 셋째주



#1.




집 근처 괜찮은 카페를 찾았다. 적당히 조용하고 적당히 아늑하다. 이름은 커피볶는 고양이. 금요일 퇴근 후에 들러 다음날 오전에 마실 커피를 미리 한잔 사서 들어가고, 토요일밤 운동가기 전에 들러 한주동안 수첩에 붙여둔 포스트잇들을 타이핑해서 옮겨두는 게 2월 들어 굳어진 루틴이다. 앞으로는 조금 일찍 나와 주말동안 처리해야 될 일들과 해야될 공부도 여기서 같이 해버릴까 생각 중이다.


희한하게도, 몇년동안 "예측불가능한 일상"을 바래왔던 나는, 2019년 들어서는 내 자유시간에 규칙과 반복을 계속해서 찾게 된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겪는 일이 이미 충분히, 때로는 과할만큼 예측불가능하기 때문이 아닐까. 같은 맥락일지는 모르겠지만, 올해 들어서는 누구와 따로 약속을 잡아 만나거나 밥을 먹거나 술자리를 가진 적도 없다.


마음의 겨울잠. 겨울잠을 자고 있는 것 같다. 여기저기 긁히고 베이고 다친 마음이 회복될 때까지, 조용히 잠을 자게 해주고 싶다. '지금은 멀리 나와 있어, 나중에 날 따뜻해지면 보자'고 했던 사람들에게 약속을 지킬 수 있었으면.






#2.




금요일 또한 다른 날과 다를 바 없는 평일이다. 일주일 동안 쌓인 피로. 밤이 되면 충분히 피곤하다. 금요일 퇴근하며 창밖을 볼 때면 지금부터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려 들뜬 사람들의 체력이 참 대단하게 느껴진다.

내게 금요일은 '밤에 와인 한잔을 마실 수 있는 날' 외에 그다지 특별한 의미는 없다. 있다면 운동을 하고 따뜻한 물로 씻고 들어와 이불을 덮으며, '오늘도 수고했어' 대신 '이번주도 수고했어'라고 속삭일 수 있는 정도.






#3.




구정엔 할머니집에 들렀다. 올때마다 조금씩 달라지는 소사동. 어릴적 할아버지가 매미를 잡아주시던 뒷동산은 공원이 되었다. 예전 그때가 더 공원이라는 이름에 더 어울리는 것 같은데.




중학생 때부터, 할머니집에서는 옥상에 올라와 아무 방해받지 않고 멀리 보고 있는 걸 좋아했다. 내가 좋아하던 장소는 많이 없어지곤 하는데, 이곳은 하나도 변함없이 남아있는 몇 안되는 장소 중 한 곳이다.







같이 막내이모방 침대에서 뒹굴고 놀았던 사촌은 올해 성인이 되었다. 키가 나보다 크다. 세뱃돈은 받지 않으려 했는데 다들 굳이 챙겨주셨다. "내년부턴 정말 안받을 거에요"하고 인사를 드리고 나오며, 날 배웅하러 어른들 옆에 뻘쭘하게 서 있는 사촌 손에 몰래 돈 몇푼을 쥐어주고 엉덩이를 툭 쳤다. 너 군대갈 때쯤엔 5배는 더 줄 수 있게 자리를 잡아볼게. 오랜만에 보는 귀요미 지연쓰한텐 놀러오라고 협박했다.







#4.







돌아오는 길엔 시흥하늘휴게소를 들렀다. 차가 꽤 막혀 그냥 갈까 했지만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오겠냐는 생각에 둘러볼 생각으로 들렀다. 육교같은 구조인데 Bridge Square라는 명칭이 특징을 잘 설명한다.








전체적으로 쇼핑몰에 가까웠다. 일반적으로 '휴게소'하면 떠오르는 이미지하고는 전혀 일치하지 않음. 브랜드 입점도 많고 식당 규모도 어마어마하다. 코엑스나 잠실 롯데몰같이 한곳에서 이것저것 다 할 수 있는 곳이 좋지만 광장공포 때문에 나가려면 정말 큰 결심을 해야하는 나에게 꽤 괜찮은 대안인 것 같다. 나중에 평일에 쉬는 날이 생기면 홀가분하게 놀러와서 옷도 사고 맛있는 밥도 먹고 책도 읽고 커피도 마시고 음악도 듣고 해야지, 생각했다.







(아빠의 첫 차 6854 흰색 엑센트 뒷자리에서 얼핏 들었던 기억이 나는 올드팝송에 이끌렸다. tell Laura I love her~♪)






(요즘 휴게소에선 7080노래를 usb에 담아서(!) 판다고 한다. 93년 CD세대인 젱은 그렇게 중년이 되어 가는 중)




(저걸 모르면 고속도로에 나오면 안되지 않을까...?)






#5.








연휴엔 헬스장이 열지 않았다. 트랙이 뛰고 싶어졌다. 안양종합운동장까지 가긴 너무 멀고 늦었고, 집 주변에 뭐라도 있지 않을까 검색해봤는데 내손도서관 옆에 작게 내손체육공원이라고 있었다. 사실 트랙까진 기대하지 않았고 가볍게 조깅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갔는데 웬걸 기대이상...! 구치소 옆쪽이라 그런지 산 중턱이라 그런지 주위에 아파트단지가 없어서 그런지 사람도 거의 없어서 조용하니 좋았다.









아오...... 이거는 ㅋㅋㅋㅋㅋ 수업료 사건 이후로 최고의 뻘짓.
1) 날이 추워서 도보 10분 정도의 거리지만 차를 타고 감
2) 주차장이 있어서 공공시설인데 당연히 무료지 않을까, 하고 별 생각없이 들어감
3) 주차를 하고 나오면서 보니 공영주차장을 겸하는 시설이었음. 유료주차.
4) 거기까진 좋았는데 내가 가볍게 뛰고 싶어 편의점에서 생수 사먹을 돈 700원만 들고 나왔다는 사실은 좋지 않았음.
5) 결국 운동을 끝내고 다시 집까지ㅋㅋㅋㅋ 갔다가 왔는데
6) 계산하려고 보니
7) 정산기 밑에 작게 써있는
8) "설 날 연 휴 무 료 개 방"








#6.




서로 다른 TV 프로그램 2개에서 출연자들이 킹크랩을 너무 맛있게 먹었다. 한번도 안 먹어봤는데 갑자기 먹고 싶어졌다. 무슨 맛인지 궁금했다. 비싸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지만

27년을 살았으면 이제 한번쯤은 먹어볼 때 됐다,
담배도 안피고 술자리도 안나가는데 이 정도쯤은 나를 위한 투자 할 수 있어,
나 이제 학생 아니야 경제력 있어!!!

하고 합리화😉


그렇게 일주일 동안 벼르고 있다가 금요일 퇴근하자마자 근처 농수산물 시장으로 갔다.
65000원이라는 소리를 듣고 바로 돌아나와서 된장찌개에 밥을 말아 먹었다. 일단 저번달 카드값 내고 먹자....






#7.



똑같은 스타일로 같은 옷 여러개를 번갈아 입는 게 좋다. 작년 12월에 공부할 때는 경량패딩+회색후리스+맨투맨+목도리의 조합이었다.


올해는 나도 모르게 마음가짐이 좀 달라진건지 이전까지와는 다른 패션을 추구하게 된다. 음 그니깐.... "이전까지와는 달라지고 싶다"는 강력한 무의식의 발현쯤? 왜 그렇냐면, 내가 그동안 꺼려왔던 옷들이야말로 내가 이전에는 입지 않았던 게 분명하니까, 그걸 입으면 뭔가 새로운 내가 된다는 의미부여. 그렇다. 나는 이렇게 피곤하게 산다.ㅋㅋㅋ


대표적으로 목티가 있다. 목이 갑갑하고 선크림 바른 날엔 선크림도 잘 묻고 내복이 닿지 않는 쇄골쯤은 까끌까끌 불편해 옷을 다 빨아서 입을 옷이 없는 날이 아닌 한 입지 않아왔던 목티. 목도리라는 탈착가능한 훌륭한 대체재가 있는데 왜 굳이 목티를 입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던 나.


2015년 3월부터 봄여름가을겨울 4계절 내내 입어왔던 회색 후리스도 이제 벗기로 했다. 유니클로에서 19900원에 검은색으로 새로 샀다.


그래서 요즘엔, 일전에 말했었던 흰색 면장갑과 안경줄과 함께, 목티+(검은색 후리스)+얇은 코트의 단벌신사로 살고 있다. 엊그제 수첩 포스트잇에 적었던 생각. 나만의 유니폼. 내 향. 반복과 규칙. 약한 정도의 결벽증이 있어 옷장에서 다른 옷들을 꺼내 전부 박스에 집어넣었다.







#8.


홍삼 캔디를 버리라는 말에 








생강 젤리를 선물하고 한대 맞았다.











#9.



"일이 끝나고 & 퇴근하기 전" 짧은 순간에 느껴지는 해방감에 대해.


요즘은 그 순간을 의식적으로 즐기고 있다. hollywood를 들으며 동료들의 탁구경기를 지켜봤다. hollywood는 저번 밤편지 같은 느낌. 안 듣던 노랜데 어느날 아침부터 하루종일 맴돈다.


처음 먹어보는 테라플루. 레몬맛이라니 가루형이라 불편한 것쯤은 이해해 줄 수 있지. 기껏 약을 타 탁자 위에 올렸지만 너무 먹기 싫었다. 눈앞에 있지만 안보이는 척 실컷 딴짓을 하다가 아무 예고없이 눈을 질끈 감고 들이켰다.


'야 이건 레몬맛이 아니라 쓴 맛이잖아'. 급히 믹스커피를 타 입을 가셨다.
5252 과장광고는 사기죄가 될 수 있다구☝






#10.



젱, 절도범 될 뻔하다.


화장실을 이용하러 범계 롯데백화점 식품관에 잠깐 들렀는데, 컵라면 몇개를 사갈까 해서 매장까지 들어갔다. 컵라면만 사고 나올 생각에 바구니도 안들고 들어갔는데 역시 모든 마트가 그렇듯 둘러보다 보면 살 것들이 자꾸 생겨난다. 주스에... 햇반에.... 과자에.... 통큰치킨(?)에..... 초밥에(????)...... 자꾸 손에 뭐가 계속 들린다. 결국 턱까지 이용해서 위태위태하게 장본 것들을 들고 계산대로 가던 중 new-스벅음료 발견. 스벅 캔음료는 더블샷 에스프레소 크림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손이 없어서 급한대로 코트 주머니에 넣었다.


계산을 하고 주차장에 내려가 차키를 꺼내려는데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기운. 아 그렇다. 이곳은 삐삐삐 소리나는 탐지기가 없는 곳이었나 보다. 형사처분대상자가 될 수도 있는 위험은 3천원보단 비쌀 게 분명하다. 잠깐의 고민도 없이 다시 무빙워크에 올랐다.

올라가면서는,

고의가 없었으니까 과실을 검토해야 되는데.... 흠.... 과실절도? 한번도 못들어봤는데?
그럼 규정이 없으니까 불가벌...... 이라고 하면 모두가 다 이렇게 훔칠거고...
고의는 간접사실을 증명하는 방식으로 입증한다,
나는 진짜로 손이 없어서 코트 주머니에 넣은 거였지만
세상에 어떤 사람이 봐도 그건 훔치려고 넣은 거라고 생각하겠지,
나였어도 그렇게 생각할거야, 이건 검사 주장을 탄핵할만한 방법이 없어

같은 가벼운 상상과


내가 만약 집에 도착해서 알았어도 이렇게 망설임없을 수 있었을까?


하는 무거운 상상을 동시에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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