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글쓰기 시험이 있는 날. 사실 반강제적으로 보는 시험이다. 한국어능력평가/국어능력인증시험/실용글쓰기 중 하나를 봐야 한다. 한국어능력평가는 꽤나 어렵다는 얘기를 예전부터 많이 들었기도 했고 무엇보다 내가 블로그 10년찬데! 10년동안 나름 틈틈이 많이 썼으니까 대충 보면 적당히는 나오겠지 하는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선택한 실용글쓰기. 근데 와... 벌써 10년이나 됐네. 실용글쓰기 아니었으면 10주년인줄도 몰랐겠다.
나는 주(major)가 아닌 시험에는 극단적으로 투입을 최소화하는 안좋은 습관이 있는데, 이번에도 역시 1도 공부를 하지 않았기도 했고 내가 원해서 보는 시험도 아니어서 의욕이 정말이지 하나도 없었다. 지원동기도 제대로 준비가 안된채로 면접을 보러가기 위해 잠도 별로 못자고 새벽에 일어났던 작년 어느날의 꽉 막힌 기분과 비슷했다. 시험장소는 수원 동남보건대. 시험시간은 10시였는데 전날 네비에 찍어보니 차로 20분쯤 걸리는 거리였다.
뭐 그래도 J형한테 55000원이나 차입해서 접수한 시험이니만큼 안볼 순 없으니까 일찍 일어나긴 했다. 흐느적대며 준비를 마치니 8시반쯤이 되었다.
통 잠이 안깨 아.아 한잔이 마시고 싶었지만 이뇨현상이 염려되어 생략하고 대신 아침밥을 길고 여유있게 먹고 나니 9시. 양치질도 하고 양말도 신고 이것저것 하고 나니 9시 10분. (이때까지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리야😊 동남보건대 가자" 대충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최첨단 음성인식 네비게이션 티맵의 기능에 감탄하며 출발하려던 찰나 미세먼지 체크를 깜빡했다는 게 떠올랐다. 검색해보니 해로움. 나쁨 정도였으면 그냥 갔을텐데 해로움이라 찝찝했다. 진짜 해로우니까 해로움이라고 했겠지? 하는 뭐 그런 생각. 엄마한테 1층으로 마스크 하나 들고 내려와달라고 전화한 후 입구로 나가려는데 5분을 삥삥 돌아도 출구를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알고보니 B1층에서 계속 돌고 있었다. 이게 바로 카페인 의존도가 높은 사람이 모닝커피를 안마셨을 때 일어나는 일 ㅠ_ㅠ
시계를 보니 9시 25분, 이때서야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와 뭐야 이러다가 못갈 수도 있겠는데? 심지어 핸드폰 네비가 위치인식을 못한다는 점도 깜빡하고 있었다. 힘겹게 내장네비에 터치를 하고 보니 예상 도착시간이 9시58분.
여기서 첫번째 레슨: 전날 자기전 네비에 찍어봤을때의 예상소요시간은 새벽에 텅텅 빈 교통상황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보다 과소평가된다. ㅠㅠ '동남보건대학교 사담기념관'까지 입력할 시간도 없어서 동남보건대로 찍고 부리나케 출발했다.
고속도로를 타기도 전에 신호는 왜 이렇게 딱딱 걸리던지 내가 가까이 가기만 하면 귀신같이 빨간불로 바뀌는 신호를 보며 이게 그 유명한 머피의 법칙인가 생각했다.
겨우겨우 내손동을 벗어나 고속도로로 진입하면서는 정말 오랜만에 초집중했다. 지금부터 진짜 실수하면 안돼, 딱 한번이라도 네비 벗어나면 안돼😨 그리고 동남보건대에 딱 도착했을 때의 상황을 계속 이미지트레이닝 했다. 사담기념관을 네비에 다시 찍을 여유는 없어, 도착하면 주차장 아저씨가 있을거야, 아저씨한테 물어보자, 주차장에 자리없으면 일단 평행주차하고 올라가자, 가서 출석체크하고 잠깐 나와서 제대로 대자 등등.
결과는? 수원시내가 막히긴 했지만 어찌저찌 56분에 동남보건대 입구에 도착했다. 다행히 동남보건대는 외대 정도의 아담한 크기였다. 입구주차장에서 아저씨께 사담기념관을 물어보니 저 안쪽 흰색건물! 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민폐끼치는 걸 극히 꺼리는 성격이라 차마 평행주차는 못하고 그냥 후면으로 들어가서 급히 주차하고 보니 58분😨
침착해
침착해
차문을 딱 닫고 나오니 흰색 건물이 왼쪽에 하나 오른쪽에 하나 해서 2개였다😨😨ㅋㅋㅋㅋㅋㅋ
확률은 50대50이다 하고 왼쪽을 찍고 후다닥 뛰어가다 보니 전방에 보이는 학생 한분.
선생님 헉헉 죄송한데 헉헉 혹시 사담기념관이 헉헉 어디에요?
여쭤보니 손가락은 매정하게도 오른쪽을 가리켰다. ㅠㅠㅠ
결말: 10시 01분에 고사장에 올라간 젱은 입실하지 못하고 쫓겨났다고 한다.
너털걸음으로 계단을 내려오면서는 흔히들 말하는 '현실자각타임'이 세게 오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ㅋㅋㅋㅋㅋ나 오늘 뭐한거지...
내 5만5천원
5만5천원을 쓰는 최악의 방법
단언컨대 올해 최고의 바보짓
이게 다 미세먼지 때문이야
내장네비 나비효과가 여기까지 올 줄이야
같은 생각을 하며 자판기에서 커피 한캔을 뽑아 벌컥벌컥 마시며 쓰린 속을 달랬다. 한심한 기분에 금연을 시작한 이후로 최고의 흡연욕이 찾아왔지만 '금연 중 스트레스를 받아 담배를 피우면 스트레스가 없어지기는 커녕 금연에 실패했다는 우울함이 겹쳐 두배로 우울해진다'는 글을 얼마전 본 덕분인지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카페인이 도니까 머리가 좀 맑아졌다. 아담한 걸 워낙 좋아하기도 하고 외대랑 비슷해서 정감가기도 하는 동남보건대 산책을 좀 할까도 생각했지만 미세먼지도 있고 일단 여기서 도망치고 싶어지기도 해서 그냥 나왔다.
사실 시험이 끝나고 봉사활동을 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었는데 아무것도 없이 4시간을 기다릴 수가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취소하고 돌아가기로 했다. 돌아가는 길엔 여유있게 운전했다. 처음 오는 동네이니만큼 주변 구경도 하고, 다음 이사지로 유력한 오전동 근처도 가보고. 천천히 드라이브 하다보니 새삼 아까 올때 얼마나 급하게 왔는지 실감이 났고, 여유도 다시 생겨났다.
이게 뭐 대수라고. 이딴 시험 내 인생에 0.01%의 비중도 없는 일인데.
오히려 잘됐어. 일찍 일어나고 얼마나 좋아.
사람들 안나오는 오전에 여유있게 살 거 사고 들어가서 열공하면 딱이네.
5만5천원은 사회에 수업료(?) 냈다고 치지 뭐.
'사회에 수업료(?)'는 작년에 부가가치세법 강의를 자투리로 잠깐 들을 때 어떤 세무사님이 하신 말씀인데 뭔가 귀여워서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다.ㅋㅋㅋㅋㅋ 무슨 세금계산서 얘기 중이었는데, '살다보면 어떤 세법규정을 알지 못해서 가산금같이 쌩돈을 내야되는 상황이 생긴다, 그럴 땐 속쓰리지만 그냥 사회에 수업료(?) 냈다고 쳐야 잠이 잘 온다'고 하셨었나.
스물일곱에 배우기엔 너무 철없어 보이는 레슨이지만 어쨌든 ㅠㅠ 이제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엔 꽤 많이 먹은 나이니깐, 오늘의 두번째 레슨: 시험있는 날엔 늑장피우지 말기
ㅋㅋㅋ나중에 J형이 다이어리를 한번 보여줬는데 거기에 "젱에게 55000원 받기"라고 엄청나게 눈에 띄게 적혀있었다. 현금이 없는 관계로 J형의 버스비를 신용카드로 대신 긁어주며 "형 이거 나름 사연깊은 수업료에요"하고 쓴웃음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