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0월 5일 토요일

먼지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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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5일은 내 생일이다. 미루고 미뤄왔었는데, 오늘이라면 2019년 3/4분기의 가장 큰 테마였던 [먼지털기]의 끝을 맺어도 좋을 것 같다.





살다보면 변화가 필요한 순간이 온다. 변화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다. 몸이 바뀌는 변화와 마음이 바뀌는 변화. 더 강력하고 즉각적인 효과가 있는 건 물리적인 변화이다. 이런 변화는 대체로 강제성을 띤다. 내 마음은 마차 뒤에 묶인 것처럼 한참을 질질 끌려가다, 어느 순간 차츰차츰 일어나 중심을 잡고, 그동안 묻은 흙먼지를 조금씩 털어내는 것이다. 더 시간이 지나면 마스크를 착용하고 고글을 끼는 등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까지 한다.






올해는 유독 '몸이 바뀌는 변화'가 많았다. 마지막 변화는 이번 여름이었는데, 다행히 나에게 가장 긴급히 필요했던 변화였고, 앞으로 당분간 더이상의 큰 변화는 없을 것임을 선포해준 변화였다.







나는 2016년 10월 이후로 3년 가까이를 심해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었다. 그 시기 외에도 동굴 깊은 곳에 파묻혀 있던 시기도 꽤 된다. 언젠가 한번은, 내가 '지금쯤이면 해도 괜찮을 것 같애'라는 생각이 들 때쯤, 그동안 내 마음에 붙어있던 먼지를 털어보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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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관계지향적 인간은 아니지만 관계지향적으로 자아를 형성해왔다. 그렇게 될 법한 사춘기를 보낸 것이 주요한 요인이다. 그런 나에게 있어 항상 힘들었고, 항상 잘 못했고, 항상 미뤄왔고, 그래서 가장 먼저 정리가 필요한 부분은 [관계]였다.








사람은 힘들 때 받은 따뜻함을 기억한다. 이때 말하는 따뜻함은 받는 사람의 기준이다. 받는 사람이 100을 느꼈다면, 실제 주는 사람의 마음은 80이었어도 상관없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렇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라면 잘 알고 있다. 내가 가장 꺼리는 말이 '언제 한번 보자'라는 걸. 언제 한번 보자고 말 해놓고 못지키고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희미해지는 상황이 너무너무 싫고, 그래서 한번 그 말을 했으면 어떻게 해서든 무조건 지켜야 성이 풀린다는 걸.









잠시였을지라도, 조금이었을지라도 상관없다. 힘들 때 나를 생각해준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 나는 항상 [지금은 멀리 떠나 있다, 돌아가게 되면 꼭 연락하겠다]고 선의의 거짓말을 했었다. 관계를 정리하기로 했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그들에게 했던 약속을 지키는 일이다.








급하게 마음먹지는 않기로 했다. 일단 '이젠 돌아왔다'는 소식과 함께 고마웠었다는 인사를 전했다. 그렇게 연락을 주고 받다 보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나를 생각해줬던 사람도 있었고, 내 생각보다 덜 나를 생각했었던 사람도 있었다.

나도 그렇게 눈치가 없는 편은 아니라, '덜' 이었던 사람에게는 만나서 근황을 듣고 밥을 사주는 단계까지는 제안하지 않기로 하고, 나름 예의와 정성을 갖춘 인사와 간단한 카카오 선물로 갈음했다. 사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 사람을 위해서라기보다 내 마음 편한 걸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보는 게 더 맞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했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나는 정돈되지 않은 상태가 싫고, 매듭묶여지지 않은 관계가 있는 것이 싫다.










그렇게 약속을 몇개 잡았는데, 가장 최근에는 Y를 만났다. Y는 여전히 씩씩했다. Y의 성격과 가치관은 처음 Y를 봤을 때에 비해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 보였다. 반면 내 성격과 가치관은 그때에 비해 많은 변화가 있었고, 지금도 변하고 있는 중인 것 같다.

Y에게 요즘 나는 [먼지털기]를 하고 있다고 하니 혹시 자기가 먼지냐며 웃었다. 내가 말하는 먼지는 [내 마음에 남아있던 짐] 이었다는 걸 잘 이해해줬길. 그리고 솔직히 말했다. [앞으로 자주 보자고는 말 못하겠지만, 종종 좋은 일 있을 때 안부전하고 하자]고. 지금 생각해보면 뒷문장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도움이 필요할 때 부담없이 연락할 수 있는 사이로 지내자]가 딱 맞는 것 같은데, 다음부터 인사는 이렇게 해야겠다. 사실 담화의 구체적인 상세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난 Y와 내가 자주 보든 종종 보든 앞으로 못보든 앞으로의 Y의 인생을 응원하고 good luck을 기원한다. 그게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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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사람은 힘들 때 받은 상처를 기억한다. 오래 전부터 나는 상처를 준 사람과의 끈을 자르는 일에 대해 생각해왔다. 그것은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다.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은 일단 '섞인 적 있는' 관계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한번 이상 대면함으로써 신체적으로, 대화를 주고 받음으로써 정신적으로. 


그전에 용어의 정의가 필요할 것 같다. '상처'라고 표현하면 왠지 내가 일방적인 피해자인 느낌이 들지만,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날 자극irritate 했던] 경우를 포함하고, 사실 그런 경우가 더 많다. 찔려서 웅크리고 아파했다기보단 불쾌한 표정으로 애써 감정을 추스리려 노력렸던 것에 가깝지만, 어찌됐든 '상처'로 통칭하기로 하자.


내가 계속 기준을 정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은
(1) 어느 정도까지를 '상춰줬던 사람'의 범주에 넣을지와
(2) 단절의 정도를 어디까지 올릴지,
(3) 너무 적은 표본으로 판단했음이 아님을 확인하기 위해 내 감정소모를 감수하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잠시나마 연결되어봐야 하는지 였다. 


한번 각잡고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1)의 답은 생각외로 간단했다. 어차피 이 [단절] 작업은 내 마음을 위해 하는 거니까, 기준을 2 이상으로 높일 필요가 없다. 1만큼이라도 내가 상처를 받았으면 '단절해야 할 사람'인 것이다. 다만 여기서 고려해야 할 것은 상계가 가능하다는 점일 것이다. 섞인 관계이므로 무조건 (-)만 주진 않았을테고 (+)도 있었을 테니 그 부분은 상계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그 사람과 이 주제에 대해 얘기할 일은 없겠지만 만에 하나 그럴 일이 생긴다면) 그 사람 입장에서도 단절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2)에 대해선 
이미 몇명에게 한 것처럼 [모든 연락처 삭제 및 차단, 카톡 등 SNS에서 그 사람이 나에 대해 볼 수 없게 차단 및 비공개 조치] 를 할까도 했었지만
② 그냥 심플하게 [내 인생에서 없었던 사람]으로 하는 걸로 하기로 했다. 

생각할 것도 많고 즐길 것도 많다. 시간쓰는 게 아깝다. 



(3)에 대해선, 그렇게 하긴 싫지만 그렇게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이유는 너무나 간단하다. 나도 실수를 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① 대신 딱 한번. 딱 한번 더 꾹 참고 표본확보하고 생각에 변함이 없다면 두번다시 보지 않기.
② 너무 과거의 일인 경우에도 최근 시점으로 한번 더. 
③ 다만 한번 판단했으면 절대 되돌리지 않기. 영원히 끝.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참는 것과 아쉬운 마음을 참는 것 모두 힘든 일이다. 
처음에만 힘들고 갈수록 괜찮아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역시 힘든 건 힘든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변화는 때론 고통을 수반한다. 
챙겨가고 싶지 않은 기억은 새로운 몰입으로 "덮으면" 한결 수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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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먼지털기도 중요하지만 몸의 먼지도 털어야 의미부여도 되고 좋을 것 같았다. 멀리까지 가긴 여건이 안맞아서, 일부러 바람 많이 부는 날을 골라 월미도에 갔다. 바닷바람을 실컷 쐬면서 몸의 먼지도 마음의 먼지도 훌훌 다 털어버리겠다는 작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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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안산에서 20년 가까이 살았다. 안산에선 당연하게도 많은 일이 있었고, 가장 오랫동안 마음에 남아있던 짐도 이곳에 있었다. 8월 말엔 1주일 정도 휴가가 있었는데, 그 휴가 마지막날에 왠지 지금이 딱 매듭지을 때라는 생각이 들어 충동적으로 나섰다.



안산 강서고등학교. 자퇴하기 전 다녔던 고등학교. 내 마음의 짐은, 당시 담임선생님께 ① 건전한 사회인으로 잘 큰 모습을 보여드리고 ② 그때 내 선택을 존중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는 것이었다.




정확히 10년 전의 열일곱살의 나는 10년 뒤의 내가 이 모습으로 이 거울 앞에 다시 서게 될 줄 알았을까? 최소한 키가 그대로일거라고는 상상 못했을텐데. 미안하네...^^;






다행히 담임선생님은 아직 퇴임 전이셨고, 교무실에 계셨다. [선생님 저 000입니다, 기억하십니까?] 하니까 내가 널 기억 못할 수가 없다며 웃으셨다. 두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눴다. 나의 과거와 현재, 교육자로서의 교사와 직업으로서의 교사, 테니스에 관해 이야기했고, 후회한 적 없냐]는 질문엔 말없이 웃었고, 마지막엔 이곳에 온 목적과 함께 오랫동안 미뤄둔 말, 해야 했던 말을 드렸다.





1층엔 교실이 없고 행정실과 교장실 등이 있다. 그래서인지 학교를 다닐 땐 1층 복도는 거의 사용한 기억이 없다. 그런 나에게 딱 한번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면, 마지막 날, 자진퇴교동의서에 서명을 끝내고, 이젠 정말 나가기만 하면 됐을 때, 그때 이 학교에서 마지막으로 걸은 복도가 1층 복도였다. 

그리고 그 순간은 10년동안 기억에서 지워져있다가, 10년만에 1층 복도를 걷는 순간 다시 떠올랐다. 나는 목밑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울컥했다. 서러운 17살짜리 어린애에 대한 안쓰러움. 눈물이 한가득 차올랐지만 흘리진 않았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그렇다. 차오를 땐 있어도 흘리진 않는다. 이젠 어른이니까 더더욱 그래선 안된다. 

학교를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도 그날 이후로 처음이었다. 담임선생님과 마지막으로 악수를 하고 교문을 나서며, 행복해지기 전까지 돌아보지 않을 거라고 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던 기억이 난다.


내가 가장 소중히 하는 사람은,

내게 마음을 줬던 너도 아니고
내가 마음을 주는 너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과거의 나, 옛날의 나,
힘들었던 때의 나.



마지막 짐을 덜었으니, 이제 이곳에 오지 않겠어.
여기선 대체로 행복하지 못했거든. 
이 도시는 내 정서와 어울리지 않는 도시였어. 
이제 내 정서와 맞는 것을 하나씩 찾아가고 싶어.













<6>


9월 19일 금요일에는 외부교육에 참석했는데, 내용이 아주 알차고 [먼지털기 프로젝트]에 딱 어울리는 강의였다. 여러가지 활동이 있었는데 그 중 인생그래프를 그리는 활동이 기억에 남는다. 항상 과거 일을 머릿속으로 회상만 했지 실제로 글로 적어가며 하나하나씩 되짚어봤던 적은 없었다. 


생각해보면 가로축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인생그래프의 x축은 시간 t이다. 특정 해에 나는 몇살이었고, 그때는 무슨 일이 있었고. 반면 인생그래프의 y축은 행복이다. 나는 y값이 양수인지 음수인지와, 극대점과 극소점의 x좌표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그래프 변곡점의 구체적인 y값을 써넣으며, 또 그래프 전체의 개형을 보며 과거 한해한해의 내 모습과, 그때의 내 행복 또는 불행을 차근차근 곱씹어봤다. 이에 대해서 조원들에게 이야기하는 시간도 있었고 그들의 피드백을 듣는 시간도 있었다. 


강사분은 인생그래프를 그려보는 것이 [내 인생의 가방을 열어보는] 작업이라고 했고, 살면서 한번은 꼭 필요한 작업이라고 했다. 먼지털기를 정의한다면 딱 그게 아닐까? 내 인생의 가방 열어보기. 그리고 버릴 것 버리기. 그날 집으로 돌아가면서는 오랜만에 블로그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했다. 맑은 밤하늘에 백운호수를 한바퀴 뛰었는데, 정말 먼지가 털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는 수첩에 이렇게 적었다.

옛날얘기 끝. 돌아보기 끝. 
이젠 새로운 정체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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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털기를 끝내며. 
가방을 열어보고 버려야 할 것들을 버렸으니, 이젠 새로운 가방을 쌀 차례다. 먼지털기를 하는 동안 사용한 수첩이 있는데, 빅데이터를 분석해보면 가장 많이 적힌 키워드는 대략 다음과 같다. 

- 내 색깔 잃지 말고 (남들에 휩쓸리지 않기 / 정서에 안맞는 옷 입지 않기 ······)
- 무게중심 잡기 (마음 증량 / 차분 / 무자극 ······)


왜 저런 결과가 나왔을까? 짐작건대 먼지털기를 하며 내 색깔로 살 때 가장 편안하고 즐겁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이어지는 4/4분기에는 NEW IDENTITY를 찾아볼 예정이다. 


2019년 27살의 생일.
내 마음의 먼지는 깨끗하게 털렸다. 
이제 같은 먼지가 쌓이는 일은 없을 거고,
비슷한 먼지가 찾아와도 현명하게 후 불어버릴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조금씩 내가 원하는 모습이, 
강하고 단단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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