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여유라곤 1도 없었던 4주였다. 어느새 다시 찾아온 개강과 함께, 공채시즌을 맞아 6군데 정도 자소서를 쓰며 채용설명회를 돌아다녔고, 어제는 4주동안 날밤을 새가며 벼락치기로 준비했던 관세사 1차시험을 보러갔다.
※ 계기:
① 필기시험 미리미리 대비해둘겸 회계공부 하다가 → 전범위 모의고사로 풀어보고 싶어짐 → 그렇게 여러 국가시험 기출들 뒤적이다가 → 관세사 1차에 회계학이 있다는 사실 발견
② 자소서에 (어쩔 수 없이) (공부한 적 없지만) 관세법과 대외무역법을 어필하게 되는데 붙을 때마다 고통스러움, 외환전문역 같이 앞으로 딸 가능성 있는 자격증도 있고 하니 아예 이참에 맛봐놓고 줄기차게 써먹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③ 몇몇 사건 이후 허무함과 무가치함에 자꾸 이끌림, 딴 생각 들지 않게 할 강한 드라이브 필요 (예컨대 1차를 붙건 말건 집중한다는 사실 그 자체)
늦게 접수한 탓에 시험장소는 창동이었다. 얼마만에 다시 온 걸까? 생각해보면 창동은 좋은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장소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내가 사랑하는 따뜻한 계절에만 적을 두었던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창동교를 지날 땐 언제쯤 무슨 이유로 여길 다시 오게 될까,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 나한테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다시 올 수 있는 사람처럼 아쉬움없이 빠른 걸음으로 헤어졌다.
시험이 끝나고는 오랜만에 머리를 다듬으러 갔다. 다시는 앞머리를 내리지 않으리라 4주동안 굳게 다짐했었다. 나는 가벼운 것을 너무나 좋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앞머리를 고수했던 이유는 내가 얼굴이 길고 이마가 넓어서 앞머리로 좀 가리는 편이 아무래도 낫지 않겠냐는 생각에서였다. 내가 4주동안 곰곰이 생각해본 결과 아무리 가볍고 짧게 잘라도 앞머리가 있는 한 답답하고 덥수룩해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정전기도 싫고, 갈라지는 것도 싫고, 불특정다수에게 그렇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없고, 무엇보다 헤어스타일이 문제가 아닌 외모여서ㅋㅋㅋㅋㅋ 이제 앞머리 내리지 말어야지. 아주 그냥 확 쳐버렸다.
고시촌에 들러 오랜 방황을 끝내고 감정평가사 시험을 준비하러 올라온 멍렬이를 만나 갈비탕을 먹고 사우나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한심est 생활을 정리한 것을 축하할 겸 시험공부를 응원해줄 겸 갔는데, 들어보니 고시원 옆방에 친한 고등학교 친구(노무사를 준비한다고 함)가 같이 산다고 한다. 그렇게 외로울 것 같지는 않아보여 다행이다. 사람이 어찌나 한순간에 확 달라지는지, 저녁때 가볍게 한잔 하자니까 "내일 오전 수업을 가야 한다"는 정말 내가 아는 멍렬이의 입에서 도저히 나올 수 없는 소름끼치는 말을 해서 깜짝 놀랐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싫다는 사람한테 절대 두번 안매달리기로 했다고 농담반 진담반 놀리면서 한참 웃다가 헤어졌다. 그리고는 역시 고시촌에 왔으니 안들릴 수 없는 47번가 카페에 들러 핸드드립용 원두를 사고 사장님이랑 한참 떠들었다. 이제 47번가 카페는 한번 날잡고 쭉 썰을 풀 때가 된 것 같다. 조만간 씀!
관세사 1차. 결론부터 말하면 가채점 결과 평균 60점으로 정확히 커트라인으로 합격했다. 사실 난 답을 밀려썼다거나 마킹실수를 했다거나 하는 말들 전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냥 보고 옮기기만 하면 되는 일인데 그걸 그 중요한 순간에 실수한다는게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었고, 나는 실제로도 여태껏 살며 단 한번도 그런 실수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근데 이번 시험엨ㅋㅋㅋㅋ마킹실수는 아닌데 시험지 한 장이 접혀져서 통째로 넘어가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있었다. 왜 그 뻣뻣한 재생용지 마찰력 때문에 붙어있는거 있잖아. 와 진짜 5분 남기고 정신없이 마킹하고 있는데 한장 6문제가 통째로 비어있는 걸 봤을때의 그 철렁함은 정말이지.....ㅋㅋㅋㅋㅋ끔찍했다.
오후 5시쯤 가답안이 나와 채점을 할 때는 더 아찔했다. 진짜 한과목 한과목 할때마다 심장에 무리가 갔다니까..... 따뜻한 물로 샤워하면서 맥주를 두 캔정도 마셨는데 너무 오랜만에 마신 탓인지 어제 3시간밖에 못 잔 탓인지 심장에 너무 무리가는 하루를 보낸 탓인지 금방 취해서 근 4주만에 '내일에 대한 부담'이 없는 채로 기분좋게 곯아떨어졌다.
사실 시험 직전날은 SK 마감일이었다. 5,000자짜리 자소서를 써야 했다. 솔직히 내 실력에 대한 자신감이 전~~~혀 없었기에 그냥 SK를 쓰고 시험장 가지말까 하는 생각을 아침에 한시간은 했다. 그래도 그동안 샜던 밤이 아까워서, 그동안 먹은 몬스터에너지가 아까워서, 저번주에 읽은 고 정주영 회장의 자서전이 생각나서, 거울을 보며 "웃자 웃으면 안될 일도 돼"하고 힘을 냈던 시간들이 아까워서 남은 반나절을 1차에만 올인했었다. 그게 주요했다. 끝까지 물고 늘어졌던 것.
그렇게 나는 어제 엄청난 자신감을 얻었다. 내 실력이나 내 지능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가능성은 항상 열려있다는 믿음에 대한 자신감이다. 안되는 것도 없고 못할 것도 없다.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관세사 공부를 더 하진 않겠지만 ㅡ 나는 지금 경제력과 신분이 매우매우 시급하고 관세사든 다른 전문직이든 로스쿨이든 고시든 불문하고 수험생활 할 여유도 & 형편도 전혀 없다, 1차시험을 봤던 건 순전히 민감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였지만, 이걸로 충분하다.
매년 잔인했던 겨울도 다 지나갔다. 많은 일, 많은 감정, 많은 생각들이 있었지만 나는 이제 다 지나왔고, 하루하루, 하나씩 하나씩 새로운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이제는 정말 스스로의 행복을 만들어 갈 시간이다.
그리고 더이상 하나도 아쉽지 않은 내 마음을 보며, 내가 택해야 할 마음가짐은 '문을 닫고 나가는 사람'이 맞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오는 길엔 사고 싶었지만 파는 곳이 영 없었던 미니미 지우개와 진홍색 펜을 사서 기분이 너무 좋았다. 소확행!)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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