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19일 월요일

탈옥


탈옥한 죄수가 해피엔딩을 맞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 하루하루들. 해답을 구하고 싶은 질문이 많은데 나는 계속해서 기권표를 던지고 있었다. 그러다 어제는 새벽 3시쯤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자니 불현듯 야릇한 충동이 들었다. 그럼 그냥, 도망가자.


어디로? 맘 같아선 술자리에서 매번 실없이 흘리는 것처럼 버뮤다. 하지만 trip to Bermuda라는 재화는 내 예산집합 한참 밖 보이지도 않을만큼 먼 곳에 있으니까 그건 불가능. 그럼 그냥 어디든 상관없이 나에게 '계기'가 될 수 있는 곳으로. 지긋지긋한 패배자 생활을 끝낼 모멘텀을 줄 수 있는 곳으로.



그길로 짐을 꾸렸다. 도밍치는데 이것저것 따지고 생각할게 뭐있어. 아주 가볍게. 여분의 옷, 양말, 장갑, 휴대용칫솔, 군밤장수모자. 끝. 얼마나 걸릴 지, 어디서 잘 수 있는 지 따위는 알아보기 싫었다. 그냥 발 닿는 데로, 발 닿는 대로. 길이야 대충 네이버 지도를 보면서 가면 되겠지.




다음날 오후 2시에 일어나 바나나를 하나 집어먹고 출발했다. 사실 고속버스를 타고 대충 근처까지 가서 걸으려고 했는데 충동적으로 자전거를 타고 출발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어딜가든 지하철이고 버스고 안산발은 도저히 타기가 싫어서. 이제 안산은 도무지 버티기 힘들 정도로 지긋지긋하다. 미안해 내고향 내 마음이 그런걸 어쩌겠니. 암튼.


이 자전거는 나름 사연이 있는 자전거다. 2011년 10월 초, 수능을 한 달 앞두고 학원을 그만뒀다.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도서관을 다녔는데, 꼴에 수험생이라고 오고가는 시간이 아까워 자전거를 중고로 한대 샀다. 10만원이었나. 그렇게 한달을 타고 방치.


대학생이 된 후에는 가끔 안산에 내려와 동네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 주로 탔다. 1학기 여름방학 때는 3주 정도 다농 근처에 있는 카페에 매일 다니며 K의 검정고시 공부를 도와줬었는데 그때 탔던게 많이 기억난다.


민간인에서 민간인이 아니었다 다시 민간인이 된 여름에는 버스로 20분 거리에 있는 중앙도서관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가끔 심란할 때면 경수중학교 뒤쪽으로 수인선을 타고 노적봉 폭포까지 크게 돌면서 답답한 마음을 풀기도 했었다. 그해 가을쯤에 700번을 타고 강남에 급하게 나갈 일이 있어 버스정류장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가 근처에 묶어두고 겨울이 지날 때까지 그 사실을 잊은 적도 있었다.


여튼 그렇게 나름 동고동락했던 자전거, 오늘은 이별하는 날. 딱 갈 수 있을 때까지만 타고, 어느 번듯한 자전거주차장에 자물쇠를 묶지 않은 채로 두고 떠나기로 했다.







'오픈라이더'라는 자전거 네비게이션앱의 안내에 따라 시낭운동장 쪽으로 빠져 수인선을 타고 올라갔다. 노량진 가는 5601번의 경로와 거진 일치했다. 다만 얼마 가지 않아 2가지 문제가 생겼다. 첫째는 노쇠한 자전거의 앞바퀴에 실빵꾸가 났는지 가면 갈수록 바람이 빠지고 있다는 것이었고, 둘째는 안산고쯤 오자 핸드폰 배터리가 오링이 나버렸다는 것. 추울줄 알고 두껍게 껴입고 왔는데 땀을 흘려서 너무 더웠다. 웃옷 하나를 벗어서 가방에 넣었다. 얼마전에 산 히트텍 엑스트라 웜의 효능은 정말 대단했다. 히트텍은 내가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라 생각하는 2가지 중 하나다. 나머지 하나는 비데.




초록색 길은 자전거 전용도로였는데, 여기서 한 2키로쯤 더 가면 긴 내리막 구간이 나온다. 거길 지날 때가 짜릿했다. 앞바퀴에 펑크난 고물자전거로도 내 옆을 지나는 차와 비스무리한 속도가 나왔다. potg.





할머니집에 갈때마다 매번 지나쳤던 목감IC쯤 오자 슬슬 자전거 앞바퀴에 한계가 왔다. 자전거라는 물품이 응당 가져야 할 fitness for ordinary use에 의심이 들 정도로 내가 페달을 밟는 운동에너지를 회전에너지로 전환하는 효율이 0에 수렴했다. 당장 내다 버리고 싶었지만 그동안의 정도 있고, 양지 바른 곳에 유기해주겠다고 다짐했기도 했어서 당분간은 안고 가기로. 편의점에서 바나나우유를 사먹으며 핸드폰을 잠시 충전시켰다. 900원짜리 하나를 사면서 5만원짜리를 낸 게 조금 미안했다.


근처 의자에 앉아 같은 화폐 안에서도 유동성의 차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곰곰이 해봤다. 방금 내가 겪은 것 같은 심리적 요인이 있을테니까.










한참을 달려 안양에 진입, 더 한참을 달려 안양천에 진입, 여태까지의 한참을 모두 더해 10배한 만큼의 한참을 더 달려 인덕원역에 도착했다. 안양천은 조용하니 좋았다. 자전거도로가 잘 되어있는 만큼 자전거 바람넣는 곳이 최소한 한군데는 있으리라는 간절한 희망으로 굴러도 가지 않는 자전거의 페달을 이악물고 밟아 보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전조등이 달린 좋은 자전거들이 나를 쌩하고 지나갈 때면 노동경제학 수업이 떠올랐다. 똑같이 한번 페달을 밟아도 누구는 저만치 가고. 꾸역꾸역 밟으면서도 왜 나는 쟤네만큼 못할까 패배감에 빠지는 사람도 있을테고, 세상은 불공정하다는 사람도 있을테고, 다 알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을테지. 나는 어느쪽인가. 오늘만큼은 못따라잡을걸 알면서도 고물자전거의 페달을 밟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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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be updated - 외장하드 16하_겨울 폴더에 완결본 있음







































2016년 10월 25일 화요일

16/10/25(월)의 기록


어제는 늦게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늦게까지 잠이 오질 않았다. 잠이 드려는 찰나에 뭔가가 머리 위로 툭하고 떨어졌다. 반사적으로 잡아서 허공에 던졌는데 그 잡히는 느낌이 순간적으로 묵직했다. 순에선 말그대로 이상야릇한게 고약한 냄새가 풍겼다. 잠이 싹 가셔 불을 켜고 살펴보니 풍뎅이같이 생긴 벌레였다. 덕분에 야밤에 한참 세수를 하고 한시간 가량을 더 뒤척이다 3시가 넘어 잠들었다. 처음 침대에 누울 때 계획했던 7시50분 알람이 지나치게 비현실적임을 자기 직전에 깨달아 취소하고 잤음에도 7시 45분에 눈이 확 떠졌다. 신기하게도 그런 순간이 있다.



수업 10분전에 도착해 4분만에 학식 닭곰탕을 정말 맛있게 먹었다. Legal Aspect 수업에선 오랜만에 지목당했고 "in itself" 파트에서 조금 횡설수설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잘 마무리했다. 재정학 수업은 영어과 수업에 대한 걱정이 자꾸 들었지만 후생경제학 2정리 부분부터는 완전히 몰입해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들었다.



끝나고 아리가또멘에서 일본라면을 먹고 싶었으나 브레이킹 타임과 겹쳐 실패했다. 대신 창동역에서 핫바와 오뎅국물을 먹었는데 크.. 한계효용이 가장 큰 순간이었다. 버스를 2개나 놓치긴 했지만.



더 아날로그식 인간이 되어보고자 한다. 수첩에 비닐바인더를 끼워 지갑대용으로 들고 다닌다. 항상 지퍼를 열어야 해서 결제할 때 불편하긴 하지만 많은 생각을 기록할 수 있어 좋다. 카톡은 지운지 꽤 됐고, 핸드폰은 아예 방에 두고 나올 때가 많다. 음악은 mp3로 듣는다.



장학관밥은 항상 억지로 먹는 느낌이다. 퍽퍽한 밥을 억지로 구겨 넣으면서, 핫바가 2000배는 더 맛있다고 생각했고, 도봉 01번 마을버스에 대한 내 의존도는 얼마나 될까 고민해봤다.



2016년 10월 19일 수요일

MISSION COMPLETE

어제는 5시간동안 재정학 시험을 보면서 극대화 문제를 50개는 푼 것 같다. 군시절부터 max 캔커피의 가성비를 좋아했었는데 당분간은 쳐다보지도 않으리라 다짐했다.


이번학기는 작년 2학기처럼 월화수에 과목이 심하게 몰려있다. max의 후유증이 가시기도 전에 날밤을 새며 짱깨와 맥모닝을 6시간 간격으로 시켜먹었다. 24시간 배달이 되는 중국집이 있었다니. 난 그동안 뭘한걸까. 몇달만에 동방에 들르자니 1학기 시험기간으로 돌아간 역데자뷰가 왔다. 소파에 누워 산업조직론 ppt를 봐야할 것만 같은 기분. 생각해보면 저번학기 7전공 23학점 도대체 어떻게 했었나 싶다. 그래, 방황도 많이 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하기도 했다. '추억보정'이라도 상관없다. 과거의 나에게 박수를. 


해가 뜰 때까지 법경제학 교과서를 읽으며 내가 되어야 하는 것은 specialist인지 generalist인지, 나는 어느 것을 원하는지, 사회가 나에게 요구하는 것은 어느 쪽의 자질일지 생각에 잠겨봤다.


법경제학은 코즈정리의 한계와 punitive damages를 한국 법체계에 general rule로 도입하는 것에 대해 비평하라는 문제가 나왔다. 300단어 제한이 있는 시험은 처음이었는데 시험을 보면서 좋은 글이 갖추어야 할 요소는 '간결함'이라는걸 새삼 깨달았다. 특히 '간결함'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비약이 되지 않게 하는 것. 단어 제한에 맞추다보니 처음에 생각하는 구상보다 전개가 생각보다 많이 산만해졌다. 이렇게 한번 더 learn by doing.


다 끝내고 나오니 날씨가 얼마나 따스하고 좋던지. 역시 매도 먼저 맞는게 낫다. 옛말 틀린거 하나 없어. 3시 수업 전까지 ex-룸메의 방에서 눈을 붙이지 않는다면 정말 기절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4개의 시험을 앞두고 침대에서 죽고 싶어하는 K를 위로 아닌 위로 해주고 정말 행복하게, 눈을 감고 10초도 지나지 않아 잠들었다. 그 10초 동안, 두번 다시 내 인생에 밤샘은 없고 오늘의 고통을 내일로 미루는 일도 없을 것을 스스로에게 공표했다.


그러나 잠은 땡겨쓰면 반드시 이자를 보태 갚아야 하는 법. 알람을 5개는 해두었건만 단 하나도 기억나지 않은 상태로 4시에 일어나 부랴부랴 데이터분석 수업에 한참 늦게 들어갔다. 조용히 맨뒷자리에 앉아 땡땡부어 떠지지 않는 눈으로 당일 실습과제 1문 2문을 건너뛰고 3문부터 답을 적고 있노라니 교수님께서 뒤에서 슬쩍 보시고 웃으시며 1문만 하라고 자비를 베풀어 주셨으나 시간이 부족해 결국 1문에는 방법론만 적고 부끄럽습니다...라고 각주를 달아 제출했다. ^_^


그리고 갑자기 별다른 이유없이 앞으로 청바지를 웬만하면 입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이젠 789가 끝나면 어둡다. 역 건너편에 있는 '맛집 찾다 차린 맛집'은 언제 한번 가봐야지 했던게 벌써 4년째다. home sweet home으로 향하는 23분발 서동탄행 1호선 열차에서 문득 떠오르는 계란빵과 역사 자판기커피를 좋아하던 어린 나의 추억에 잠겨 기분좋게 잠들었다. 

2016년 9월 25일 일요일

2016년 8월 21일 일요일

#finale.






you've arrived
we love dreamers
there's only one
everything under the sun
things look different here

안녕 ^_*



2016년 8월 20일 토요일

#12. 스페인 마드리드




마요르 광장. 한국인도 꽤 많았지만 동질감을 느끼기 싫었다. 그들이 미워서, '한국이 싫어서(c.f. 동명의 소설이 있는데 꽤나 재밌다)'가 아니라 이왕 탈출한 만큼 탈출한 동안은 제대로 탈출하고 싶어서.






산 미구엘 시장. 이런 시장에서 모르는 외국인과 섞여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대화와 농담을 나누며 잔뜩 취하기? 살면서 한번쯤은 할만한 경험이라고 생각하나 그 이상은 내 정서와 심각하게 맞지 않고 그 한번이 오늘은 아닌게 분명하다. 남들의 로망이라고 내 로망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지. 






왕궁. 탁 트인게 좋았지만 내부까지 들어가진 않았다. (창렬)








100년 전통으로 유명한 가게에서 별 기대없이 츄러스를 먹는데 먹는 순간 뒷통수에 번개가 지나갔다(요리왕 비룡). 너무 맛있어서 언젠가 만들어먹으리라 굳게 다짐하고 츄러스 내부를 다급하게 찍었다. 취사병 출신 멍렬을 꼬드겨 후문에서 츄러스 장사나 해볼까 생각해봤다. 모르모트형과 훌륭한 보완적 관계가 되겠지?









엄청 오래된 가게라던데. 저녁을 여기서 먹으려다 20시부터 연다고 해 돌아갔다. 아무리 봐도 한 브랜드의 가치에서 역사 내지는 전통이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모든걸 dominate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스페인의 더위는 불쾌하지 않다. 
돌아가는길에 헬스앱이 오늘 4만보를 걸었다며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2016년 8월 19일 금요일

#11. 스페인 발렌시아


아쉬운 팔마에서의 일정을 마무리하는 날이다. 일어나 분주히 준비하고 택시를 타고 팔마항으로 가는 길엔 창 밖 풍경이 가히 장관. 

아침도 못먹고 쫄쫄 굶은 상태로 바닷바람을 쐬다가 1시가 되어서야 뷔페에서 점심을 먹었다. 푸딩같은 요거트와 어제 파에야만큼 짠 파스타가 인상적이었다. 식사 후 맨 꼭대기 헬기 착륙장에 올라가 깨끗한 망망대해를 감상하다 돌아와 영화관 같이 해둔 대형 홀에서 조금 불편하게 다리를 뻗고 도착할 때까지 쭉 자....려고 했으나 도중에 어린애들 우는 소리에 3번 넘게 깼다
 
19시쯤 발렌시아에 도착했으나 기차시간이 임박해 서둘러 나가 택시를 잡았다. 발렌시아역에 도착해 기차표를 끊는데 60유로. 엄청 비쌌다. 우리나라로 치면 KTX정도 되는 기차인 듯. 만국 불변의 맥도날드에 다시 한번 찾아 'Mc익스트림 grilled BBQ'를 시키는데 BBQ1880으로 읽는 만행을 ㅋㅋㅋㅋ 저지른 후 점점 더 나빠지는 시력보호에 힘쓰리라 생각했다. 눈 마사지 이런 것들 하루에 한 번은 해야지...
 
역 밖은 해가 거의 다 저물어 가는 그리 덥지 않은 여름저녁 날씨, 내가 제일 좋아하는. 2110발 기차를 타고 출발. 오늘은 주로 시계와 언어에 대해 생각했다. 그동안 꽤 많은 기차를 타봤는데 오늘의 기차는 그중에서도 가장 시설이 좋은 편이라 만족하던 중 문득, 8만원짜리면 당연히 좋아야지-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