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옥한 죄수가 해피엔딩을 맞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런 하루하루들. 해답을 구하고 싶은 질문이 많은데 나는 계속해서 기권표를 던지고 있었다. 그러다 어제는 새벽 3시쯤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자니 불현듯 야릇한 충동이 들었다. 그럼 그냥, 도망가자.
어디로? 맘 같아선 술자리에서 매번 실없이 흘리는 것처럼 버뮤다. 하지만 trip to Bermuda라는 재화는 내 예산집합 한참 밖 보이지도 않을만큼 먼 곳에 있으니까 그건 불가능. 그럼 그냥 어디든 상관없이 나에게 '계기'가 될 수 있는 곳으로. 지긋지긋한 패배자 생활을 끝낼 모멘텀을 줄 수 있는 곳으로.
그길로 짐을 꾸렸다. 도밍치는데 이것저것 따지고 생각할게 뭐있어. 아주 가볍게. 여분의 옷, 양말, 장갑, 휴대용칫솔, 군밤장수모자. 끝. 얼마나 걸릴 지, 어디서 잘 수 있는 지 따위는 알아보기 싫었다. 그냥 발 닿는 데로, 발 닿는 대로. 길이야 대충 네이버 지도를 보면서 가면 되겠지.
다음날 오후 2시에 일어나 바나나를 하나 집어먹고 출발했다. 사실 고속버스를 타고 대충 근처까지 가서 걸으려고 했는데 충동적으로 자전거를 타고 출발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어딜가든 지하철이고 버스고 안산발은 도저히 타기가 싫어서. 이제 안산은 도무지 버티기 힘들 정도로 지긋지긋하다. 미안해 내고향 내 마음이 그런걸 어쩌겠니. 암튼.
이 자전거는 나름 사연이 있는 자전거다. 2011년 10월 초, 수능을 한 달 앞두고 학원을 그만뒀다.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도서관을 다녔는데, 꼴에 수험생이라고 오고가는 시간이 아까워 자전거를 중고로 한대 샀다. 10만원이었나. 그렇게 한달을 타고 방치.
대학생이 된 후에는 가끔 안산에 내려와 동네친구들을 만나러 갈 때 주로 탔다. 1학기 여름방학 때는 3주 정도 다농 근처에 있는 카페에 매일 다니며 K의 검정고시 공부를 도와줬었는데 그때 탔던게 많이 기억난다.
민간인에서 민간인이 아니었다 다시 민간인이 된 여름에는 버스로 20분 거리에 있는 중앙도서관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가끔 심란할 때면 경수중학교 뒤쪽으로 수인선을 타고 노적봉 폭포까지 크게 돌면서 답답한 마음을 풀기도 했었다. 그해 가을쯤에 700번을 타고 강남에 급하게 나갈 일이 있어 버스정류장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가 근처에 묶어두고 겨울이 지날 때까지 그 사실을 잊은 적도 있었다.
여튼 그렇게 나름 동고동락했던 자전거, 오늘은 이별하는 날. 딱 갈 수 있을 때까지만 타고, 어느 번듯한 자전거주차장에 자물쇠를 묶지 않은 채로 두고 떠나기로 했다.
초록색 길은 자전거 전용도로였는데, 여기서 한 2키로쯤 더 가면 긴 내리막 구간이 나온다. 거길 지날 때가 짜릿했다. 앞바퀴에 펑크난 고물자전거로도 내 옆을 지나는 차와 비스무리한 속도가 나왔다. potg.
할머니집에 갈때마다 매번 지나쳤던 목감IC쯤 오자 슬슬 자전거 앞바퀴에 한계가 왔다. 자전거라는 물품이 응당 가져야 할 fitness for ordinary use에 의심이 들 정도로 내가 페달을 밟는 운동에너지를 회전에너지로 전환하는 효율이 0에 수렴했다. 당장 내다 버리고 싶었지만 그동안의 정도 있고, 양지 바른 곳에 유기해주겠다고 다짐했기도 했어서 당분간은 안고 가기로. 편의점에서 바나나우유를 사먹으며 핸드폰을 잠시 충전시켰다. 900원짜리 하나를 사면서 5만원짜리를 낸 게 조금 미안했다.
근처 의자에 앉아 같은 화폐 안에서도 유동성의 차이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곰곰이 해봤다. 방금 내가 겪은 것 같은 심리적 요인이 있을테니까.
한참을 달려 안양에 진입, 더 한참을 달려 안양천에 진입, 여태까지의 한참을 모두 더해 10배한 만큼의 한참을 더 달려 인덕원역에 도착했다. 안양천은 조용하니 좋았다. 자전거도로가 잘 되어있는 만큼 자전거 바람넣는 곳이 최소한 한군데는 있으리라는 간절한 희망으로 굴러도 가지 않는 자전거의 페달을 이악물고 밟아 보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전조등이 달린 좋은 자전거들이 나를 쌩하고 지나갈 때면 노동경제학 수업이 떠올랐다. 똑같이 한번 페달을 밟아도 누구는 저만치 가고. 꾸역꾸역 밟으면서도 왜 나는 쟤네만큼 못할까 패배감에 빠지는 사람도 있을테고, 세상은 불공정하다는 사람도 있을테고, 다 알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을테지. 나는 어느쪽인가. 오늘만큼은 못따라잡을걸 알면서도 고물자전거의 페달을 밟아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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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be updated - 외장하드 16하_겨울 폴더에 완결본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