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2월 첫째주. 의욕이 많이 사라졌다는 걸 느낀다. 무엇에 대한 의욕이었는지도 사실 희미해진 것 같다.
난 항상 내 시간의 특정 부분을 떼어내서 내가 이루고 싶은 것에 대해 투자해왔었다. 조금 다른 말로 표현하면 현재를 살면서 동시에 미래를 준비했다. 뭐 누군들 안 그러겠느냐만은.
이번주는 여태까지와는 조금 달랐다. 그냥 '지금을 산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어떤 다짐을 해서 -> 그런 생활을 했다기보다 그냥 의욕이 없어지니 그렇게 됐다.
간단한 예를 들면, 필기를 꼭 해둬야 되는 강의시간에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기도 하고, 밥을 일찍 먹고 오면 그냥 낮잠을 잠깐 자기도 하고, 샤워를 이미 다 했어도 내가 하고 싶어지면 농구코트에 가서 농구를 하고, 22시30분이 다 되도록 하루종일 책 한페이지도 보지 않았어도 그냥 누워서 일찍 자기도 하고. 하루가 흘러가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기분.
#1.
설날 전이라 13시에 퇴근시켜주는 자비를 받았다. 오래전부터 벼르고 있던 국민은행 카드 하나를 만드려고 점심밥도 생략하고 갔는데 설연휴 전 마지막 영업일이라 그런지 사람이 무지하게 많았다. 번호표에는 분명 3시 20분쯤이면 차례가 올 거라고 써있었지만 실제로 내가 업무를 본 시간은 4시 20분.
특히 세뱃돈용 신권을 교환하러 오신 분들이 많았는데 아쉽게도 내가 오기도 전에 이미 다 소진되었다고 한다. 내가 기다리는 1시간 동안 50번도 넘게 "신권 다 소진되었습니다"를 외치는 청원경찰 분이 조금 불쌍했다.
그렇게까지 지루하진 않았다. 조금 다른 선택을 했었더라면 모 은행의 신입행원이 될 뻔했던 나. 창구직원분들 일하는 걸 물끄러미 지켜보며, 저 사람들은 지금 나처럼 사회초년생이 딱 되었을 때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지금 본인의 일에 어느정도 만족할까, 상상했다.
좋아하는 자세지만 비슷한 나이 또래들이 있을때는 부담스러워서 잘 하지 못했던 '뒤집힌 꽃받침' 자세로 카드를 만들면서 옆에 꽂혀있던 주택청약 팜플렛을 정독했다.
#2.
경기도민으로 7년 가까운 통학의 후유증인지 붕 뜨는 이동시간에는 꼭 공부를 해야 된다는 강박이 있다. 주로 외워야 할 내용을 써둔 포스트잇을 양지PD수첩에 붙여두는 방법을 쓴다.
그렇게 틈틈이 수첩을 보는 나를 보고 동생인 동료 중 한명이 내 수첩에 관심을 보였다. 뭔가를 계속 적어둬야 되는 일을 맡았는데, 자기가 쓰는 수첩이 커서 불편하다고, 딱 형이 쓰는 양지수첩 사이즈가 좋아보인다고 사야겠다고.
하지만 인터넷으로 잘못 산 건지 그 친구는 PD수첩이 아니라 전화번호부 수첩을 사버린 모양이다. 밥을 같이 먹으면서, PD수첩을 사야됐는데 이걸로 잘못 샀다고 울며 겨자먹기로 억지로 쓰고 있다고.
자주 쓰는 건 항상 예비로 2개씩 더 사서 쟁겨두고 + 나보다 어린 애들한테는 그냥 큰 고민없이 지출하는 이상한 소비습관이 있는 나. 쪽지 한장을 붙여 예비수첩 하나를 책상 서랍에 넣어뒀다.
내 생각보다 훨씬 더 좋아하긴 했는데 자기 옛날 여자친구 별명도 '젱'이었다는 뜻밖의 미친소리를 했다. 내 이름 흔하지 않은데... 혹시 내 동생인가 물어보려다 혹시 맞으면 서로 소름돋을까봐ㅋㅋㅋ 말았다.
#3.
팀빌딩 짝꿍이 그려준 나.
#4.
위트가 취향저격인 교수님.
강의를 들으면서 재밌는 표현을 하실 때마다 포스트잇에 적어 필통에 던져두고 나중에 심심할 때마다 하나씩 까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5.
붐비지 않는 교보문고를 좋아한다.
20살 겨울 광화문 근처에서 일할 때: 점심을 빨리 먹고 가면 한적했다. 점심시간에 짧은 여유를 즐기는게 막 기대됐었음. 광화문 교보 안에 카페가 하나 있었는데 거기서 커피를 사마시며 '커피 한잔의 여유'라는 말을 언제 쓰는 건지 처음으로 느끼게 됨.ㅋㅋㅋ
대학생 시절: 청량리 교보문고***에 자주 갔다.
월요일 456교시(12시~15시) 강의를 들은 적이 많았음. 아침밥을 생략하고 일찍 출발해 롯데백화점 지하 푸드코트에서 아점을 먹고 시간이 남으면 교보문고에 들러 책을 읽다 갔던 추억. 456교시가 들었던게 대부분 봄학기였다. 청량리역을 딱 나오면 따뜻하고 포근했던 기억이 많이 난다. 괜시리 나도 모르게 기분 좋아져 학교까지 걸어가기도 자주 했었음.
요즘: 집에서 가장 가까운 교보문고는 범계역 롯데백화점 평촌점에 있는 교보문고인데, 무지하게 붐빔. 오전이 아니면 갈 엄두도 못낼만큼. 그래서 개장시간에 맞춰 일찍 나가 책을 읽다가 사람들이 막 쏟아져 들어올 때쯤 나오는게 취미다. 주로 '나를 위해 필요한 책이지만 사서 읽기엔 내가 완전히 독립적이지는 못한 장소에 살고 있기 때문에 부적절한' 책을 읽는다. 그런 책들을 보면 내가 했던 생각과 놀라울만큼 똑같이 적혀있어 놀랄 때가 많다.
#6.
평촌학원가 나들이.
정확히 말하면 평촌학원가에 있는 병원 방문.
도착한 그곳은 두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싶을만큼 극심한 교통혼잡구간에다 주차지옥이었다. 얘들아 주말엔 그냥 푹 쉬고 운동하고 그러는게 어떨까....? ㅠㅠ
일단 배가 고파 들어간 KFC. 내가 KFC에서 먹는 메뉴는 2가지 중 하나로 고정되어 있다. 비스킷 or 징거더블다운맥스. 오늘도 징맥을 먹었는데, 징맥은 어쩜 그렇게 뻑뻑하지도 않으면서 맛있는지 참😊 혼잡한 도로와는 달리 KFC 내부는 떠들썩하지 않은 분위기였고 사람도 그렇게 많지 않아서 좋았다.
진료를 마치고는 슬리찌 찾아 삼만리.....
요꼬마꼬는 작년 여름에 평촌도서관에서부터 충동적으로 걸어왔던 적이 한번 있다. 쪼리 질질 끌면서 중앙공원도 산책하고 커피도 마시고 노을도 보고 나름 괜찮은 기분전환이었는데. 안양시청 앞 벤치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이번 겨울에 난 어디서 뭐하고 있을까 궁금했었던 기억이 난다.
요꼬마꼬에는 왠지 있을 것 같다는 희망을 품고 들어갔지만 항상 내가 '혹시 슬리찌 있어요?'하고 물을 때마다 들려오는 대답은 '쓰레빠요?' 뿐이다. ㅠ ㅠ
포스트잇만 잔뜩 사서 나왔다. 난 포스트잇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공부를 하는 편인데, 월초에 포스트잇을 새로 살 때가 되자 300원 아끼겠다고 3M 포스트잇 말고 국내 브랜드 포스트잇을 대량구매했었다. 써보니까 아니 글쎄 풀똥이 종이에 남는다. 한번 포스트잇을 붙였던 자리에는 필기를 할 수가 없어진다. 한달동안 너무 불편했었어.....😡
#7.
가성비가 최악이긴 하지만 가끔 '그 양념치킨 맛'이 땡길 때가 있다. 도넛도 2개, 치킨도 2개, 포크도 2개니까 손가락도 2개(?!)
맥주는 기껏 사와놓고 반도 안마셨다. 이제 점점 술이 별로 땡기지 않아진다.
#8.
그래서 하루는 각종 냉동식품과 함께 무알콜맥주에 도전해봤는데,
① 생각보다 먹을 만하다
② 하지만 한 캔을 다 마실 수 있을만큼 맛있진 않다
③ 이걸 마시느니 그냥 (진짜) 맥주를 마실 것 같다
#9.
쉬는 날이면 한번에 10시간 가까이 자고 추가로 낮잠까지 잔다. 늦게 잠들면 월요일날 심하게 고생한다는 걸 경험칙으로 알고 있어서 아예 20시쯤 눕는다. 일어나면 모자를 눌러쓰고 헬스장에 가서 적당히 운동, 샤워까지 한번에 해버리고, 볼일이 있으면 오전에 다 끝내버리고, 점심밥을 먹고 나면 다시 암막커튼을 끝에만 살짝 냅두고 친 다음 누워버리기. 그러면 딱 취침등 조도만큼 빛이 들어온다. 그때가 참 편하고 좋다.
하루종일 생산적인 활동을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도 아무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 지금은 그냥 흘러가는대로 가만히 있고 싶다. 해야할 건 많지만, 그 중에선 지금 꼭 해내야만 할 것도 있지만, 잠깐만이라도 조용히 아무것도 안하고 있고 싶다.
#10.
비오는 일요일 오전. 소음이 없어 좋다. 책을 읽었다.
#11.
생애 첫 헌혈을 하러 갔다. 범계역 근처에도 헌혈의 집이 하나 있긴 한데, 주말에도 여는 건 산본역에 있는 센터라고 해서 산본으로 갔다. 헌혈의 집 산본센터는 로데오거리 한복판에 있었다. 주말 저녁이라 사람으로 북적였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런 '노는 날'에 유흥가 한복판에 나와있는게 엄청 오랜만이었다.
찾는데 꽤 걸렸다. 사실 헌혈의 집은 뭔가 명동 로드샵처럼 1층 대로변에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알고보니 건물 3층에 있었다.
깔끔하고 따뜻한 내부의 헌혈의 집. 각종 음료수와 만화책이 준비되어 있다. 주말 저녁임에도 헌혈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게 인상깊었다. 고등학생도 많았고 일반인도 많았다. 벽에 붙여진 포스터를 슬쩍 보니 헌혈 많이 하면 교육감 표창도 주고 군입대 가산점도 주고 뭐 이런저런 혜택이 있나 보다.
차례를 기다리면서 키와 몸무게를 재보니 169에 59. 드디어 조금씩 살이 찌고 있는건가? 60고지가 눈앞이다😊
혈장 헌혈을 했다. 40분 정도. 살짝 불편한 느낌이었지만 그냥저냥 참을 만하다. '아픈' 느낌이라기보다 '불편한' 느낌에 가깝다.
기념품으로는 맥도날드 상품권을 골랐다. 사용기간이 3년 남은게 마음에 들었다.ㅋㅋㅋ
산본 로데오거리는 충격적이게도 지하 전체가 다 주차장이다. 이런 획기적인 시스템은 빨리 전국 유흥가에 도입해야 된다. 번화가에 술 말고 다른 볼일로 나올 땐 항상 주차가 문제였는데. 그 와중에 경차라 주차요금이 반값인 레이....😂
#12.
수분보충을 하래서 홍콩반점에서 짬뽕밥을 포장해와서 먹었다. 헌혈도 했으니 더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있어야겠다는 강한 다짐으로 마카롱을 먹으며 나 혼자 산다를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