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15일 금요일
남도여행 에필로그2
"제일 빨리, 제일 멀리 가는 곳으로 주세요"
7년전 이맘때쯤의 남도여행은 이 말로 시작했다. 18살의 나는 이 말을 오랫동안 참고 있었다. 7년을 돌이켜보면 그 말을 다시 해볼 수 있는 기회도 몇 번 있었던 것 같은데. 선택하지 않았을 뿐이지 할 수 없었던 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그동안 있었던 많은 선택의 순간들에 대해서도.
지난주는 가까운 친구의 자취방에서 며칠 묵었다. 친구는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친구네 집에 묵는 며칠동안 얼마나 다독여줬는지 모르겠다. 차마 말은 못했지만 사실 정말 진심어린 응원이 필요한 건 나였는데. 친구가 진지한 눈으로 너 좀 변한 것 같다고, 못 본 사이에 인성이 진짜 좋아졌다고 할 때는 내심 좀 뿌듯했다. '착한 사람을 떳떳하게 좋아할 만큼은 착한 사람이 되자'고 그동안 얼마나 다짐했던가! 하지만 집 앞 1m 거리에 있는 분리수거장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기 귀찮으니 다음날 나갈 때 대신 버려달라는 친구에게 한심에 가득찬 눈빛을 보내자 친구는 "에센스 이즈 이터널, 본성은 변하지 않지"라는 명대사를 날리며 기가 막히게 태세를 전환했다.
마지막날 짐을 빼고 내려가면서 친구와 시립대 근처에서 고기에 술을 마셨다. 무슨 얘기를 하다 나왔는진 기억이 안나는데, 밥을 먹고 나와 벤치에서 커피를 마시다가 디시인사이드 레전드 여행기 중 하나인 '그냥걷기'에 대한 말이 나왔다. 아마 내가 그 친구에게 읽어보라고 추천해 줬을거다. 노량진에 있을 때 자기전에 잠깐 보려다가 해가 뜰 때까지 꼬박 읽었던 기억이 생생한 그 여행기. 집에 돌아오는 길에 문득 오랜만에 생각나서 다시 읽으려다 이번에도 역시 새벽 늦게까지 정주행해버렸다.
여행기 마지막 편을 볼 때는 찡하기도 하면서 그 여행기를 읽고 떠났던 2010년의 남도여행이 가장 먼저 생각났다. 시험기간 내내 잠깐 떠났다 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다. 이번에도 남쪽으로(북쪽으로 갈 순 없으니까, 이미 대한민국에서 갈 수 있는 최북단을 군시절 가봤으니까), 거제도 아니면 해남으로. 마지막날 직전에는 의욕이 다 빠져서 마치 이족보행하는 지렁이 내지는 포켓몬스터 마자용(보단 추워용)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학기가 끝났다는 약간의 면책권으로 따뜻한 집에서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남도여행기를 한번 정리해보고 싶었다. 실제로 몸이 갔다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한번 쭉 정리하고 나면 뭔가 새로운걸 느끼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하지만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냥걷기'의 주인공처럼. 끝나고 나면 다시 똑같이 돌아올 뿐이다. 언젠가부터 내가 느끼는 기분은 결승선을 통과한 경주마라고 하면 조금 비슷할 지 모르겠다. 그런데 사실 나는 경주마처럼 열심히 달려본 적이 없다. 열심히 달리는 건 둘째치고, 사실 나는 내가 원하는게 정확히 구체적으로 뭔지 모르겠고, 그걸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되는 지도 잘 모르겠고, 그것을 얻기 위해 필요한 합당한 노력도 할 자신이 없다. 모르겠다. 지금은 그렇다. 그냥 아무 의욕이 없다. 맞다. 난 밋밋한 깡통이다. 가진건 아무것도 없는 팔다리도 없는 로봇깡통.
예전의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힘들 때의 나는, 최소한 '무의욕증'을 집어던지기 위해 "제일 빨리, 제일 멀리"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는 있었다. 지금의 나는 핑계만 늘었다. 귀찮고, 춥고, 돈도 없고,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고. 2010년의 난 지금의 내가 2010년보단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라는 강한 믿음으로 아무것도 없는 시간들을 버텨왔는데. 부끄럽다. 얼굴을 마주 볼 자신이 없다.
그렇다고 무슨 새로운 다짐을 할 건 아니다. 옛날 여행기를 한 번 되돌아봤다고 그런 motivation이 생길리가. 지금은 그냥 털어놓는 시간이라고 할까. 하나하나씩 꺼내놓으면서, 어떤 목표로 다시 의욕을 가져볼지 곰곰이 생각을 해보는 시간. 그렇다. 그렇게 돌아보고 싶어서, 돌아보면서 같은 루트로 다시 상상 속 여행을 떠나보고 싶어서, 그때와 같은 길을 걸으며 다른 생각을 해보고 싶어서, 이번에 금고에 넣어두면 앞으로 다시 꺼내보지 않기 위해서 7년전 여행기를 한번 리마스터해봤다. 내 사진 좀 더 찍어둘걸. 아님 멍청하게 역광으로 찍질 말던가. 단발머리 청소년 젱(내 별명)의 모습이 궁금한데 영 다시보기 어렵다.
명사십리에서 나는, 강한 사람이 되자고, 아주 오랫동안 바다 앞에 앉아 다짐했었다.
작성자:
jetung1